학원 문턱을 넘기까지의 고민
거창한 배우 지망생은 아니었다. 그저 직장 생활에 치여 살다 보니 뭔가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. 매일 반복되는 회의, 엑셀 칸 채우기, 의미 없는 이메일 확인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. 그래서 강남 근처에 있는 성인 연기 학원 두어 곳을 기웃거리다 결국 상담을 받으러 갔다. 수강료는 한 달에 30만 원 초반대였는데, 처음엔 솔직히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. 취미로 시작하는 건데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. 상담 실장님이 보여준 학원생들의 공연 사진이나 연기 영상들을 보면서 ‘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’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던 것 같다. 상담실 조명이 유난히 밝아서 그랬는지, 다들 행복해 보였다.
난생처음 마주한 대본의 벽
등록하고 첫날, 강사님은 나에게 아주 짧은 독백 대본을 하나 건네주었다. 제목은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, 이별을 앞둔 남녀의 대화였다. 집에서 혼자 소리 내어 읽을 때는 ‘어, 이 정도면 나도 감정 잡을 수 있겠는데?’ 싶었다. 그런데 막상 학원 연습실에 들어가서 좁은 공간에 홀로 서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. 학원 위치가 골목 안쪽이라 창밖으로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데, 그 소음 때문에 더 긴장이 됐다. 강사님은 “그냥 읽지 말고, 상대방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고 상상하세요”라고 했다. 상대방이 없는데 어떻게 상상하라는 건지, 그 상상이라는 게 사실 제일 어렵다. 10분 정도 끙끙대다가 결국 ‘아, 이거 그냥 대사를 외우는 게 문제가 아니구나’라는 걸 깨달았다.
넷플릭스 오디션 글을 보며 느낀 허탈함
학원을 다니는 와중에 커뮤니티에서 청소년 넷플릭스 영화 오디션 글을 본 적이 있다. 대본을 미리 주는데 어떻게 연기하면 좋을지, 교복을 입고 가야 할지 묻는 글들이 많았다.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씁쓸해졌다. 나는 이제 와서 취미로 시작한다고 30만 원 넘게 내고 고생하고 있는데, 저 친구들은 벌써 그런 큰 기회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구나 싶어서. 배우라는 직업이 단순히 대본을 잘 외워서 발연기만 하지 않는 수준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최대훈 배우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더 뼈저리게 느꼈다. 그분은 대본을 워낙 잘 써주셔서 표현이 수월했다고 했지만, 결국 그건 기본기가 탄탄하니까 가능한 말이다. 나는 대사 한 줄도 제대로 안 뱉어지는데, 갈 길이 멀다.
연기 연습, 그 반복되는 무력감
퇴근하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수업을 듣는데, 사실 수업보다 더 힘든 건 수업이 끝나고 나서다.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대본을 다시 펴면 학원에서 강사님 앞에서 했던 그 느낌이 하나도 안 난다. 거울 보고 연습하다가도 ‘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?’ 싶어 한숨이 나온다. 어떤 날은 감정이 너무 과해서 닭살이 돋고, 어떤 날은 너무 건조해서 로봇 같다. 강말금 배우가 인터뷰에서 ‘매일이 나 자신과의 전쟁’이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. 여기서 전쟁은 거창한 성공을 위한 게 아니라, 어제보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말하기 위한 싸움 같은 거다. 오늘도 대본 한 문장을 수십 번 읊조리다가 그냥 덮었다.
불투명한 다음 과정에 대하여
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간다.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. 처음 상담받을 때 가졌던 설렘은 옅어지고, 이제는 숙제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잦아졌다. 다음 달 수강료를 다시 결제해야 할지 고민이다. 배우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, 그렇다고 연극 오디션을 당장 볼 실력도 안 되는데 이렇게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. 그런데 또 학원을 안 가면 그 시간이 허전할 것 같기도 하다. 일상에서 완전히 다른 감정을 쏟아낼 곳이 여기밖에 없다는 사실이, 아이러니하게도 계속 나를 붙잡아두는 것 같다. 다음 주에는 또 다른 대본을 준다고 했는데, 과연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감정이 나올지 여전히 확신이 없다. 일단은 가보겠지만,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다.

엑셀 칸 채우기처럼,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어요. 연기 학원에 등록하고 나서도, 또 다른 도전의 어려움을 미리 짐작하는 것 같네요.
혼자 연습할 때 얼마나 집중하기 힘든지 알 것 같아요. 소음 때문에 더 답답하게 느껴지네요.
저도 비슷한 경험 때문에 씁쓸해지는 마음 알 것 같아요. 30만 원 넘게 투자했는데,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.
대본 연습할 때마다 감정 조절하는 게 정말 어렵네요.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‘나 자신과의 전쟁’이 딱 맞는 표현 같아요.